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종 독살설 (문단 편집) == 배경 == 경종 독살설이 등장한 배경은 경종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데에서 비롯된다. 원래 몸이 허약하던 경종은 재위 4년(1724) [[8월 2일]]부터 건강이 급격히 위독해지기 시작했다. >임금의 병환이 계속 여러 날 동안 낫지 않아 수라(水剌) 올리는 것마저 싫어하였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또 한열(寒熱)의 징후가 있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고 약(藥)을 의논하여 시진탕(柴陳湯)을 지어 올렸다.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병을 이루었고, 해를 지낼수록 깊은 고질이 되었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昏迷)한 증상도 있었다. (중략) > >임금의 체부(體膚)의 외형(外形)은 왕성하나 비위(脾胃) 등 내장이 허하였고, 음식을 싫어하는 날수가 오래 되어 마침내 한열(寒熱)의 증세가 발생하였다. >---- >《[[경종실록]]》, 경종 4년(1724) 8월 2일 4번째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408002_004|기사]] [[경종(조선)|경종]]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경종은 병약했지만 마르고 병든 이미지가 아니라 비만 체형으로 아팠다. 실록에도 경종은 살이 쪘고 소화기관이 좋지 못했다고 적고 있으며, 때문에 아팠던 당시 기록을 보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열병에 시달렸으며 혼수 증세도 간간히 보인데다가 아픈 당일에는 [[오한]]까지 찾아왔다고 적고 있다. 음력으로 8월이면 한여름은 아니지만 더위에 시달리다가 이때 발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며 애초에 '''[[환절기]]'''다. 아무래도 경종은 서서히 아파오다가 이 즈음에 소화 불량이 제대로 찾아왔고 결국 병석에 눕게 된 것으로 보인다. 병상에 누운 경종은 이튿날 3일에도 오한 증세를 보였고 설사까지 동반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으나 오한과 설사가 반복되는 걸 봐서는 식중독 내지는 장염일 확률이 높다. 임금의 자리에 있는 만큼 식중독일 확률은 적으며[* 전근대시기인 만큼 식재료가 상하기 쉽고 관리가 어려운 시대였던건 맞지만 아무리 전근대여도 한 국가의 중핵이자 모든 역량이 최고로 집중될 수밖에 없는 궁궐 내에서 그런 사고가 터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또한 임금 같이 '높으신 분'이 먹는 식단은 식사 전 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1번, 식사 후 아랫사람들과 나눠먹는 식으로 또 1번, 이렇게 다같이 나눠먹는게 상례였다. 따라서 상한 식재료로 식중독 사태가 벌어졌다면 경종만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바이러스성 장염에 걸린 건 아닐까 추측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만하고 다한증 끝에 경연 중에 소변을 볼 만큼 다뇨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비만 → 당뇨 → 합병증으로 신장질환이 있었을 수도 있다. 특히 체내 [[크레아티닌]] 수치가 치솟으면 한여름에도 오한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는 후대에 기록을 바탕으로 한 독자연구일 뿐으로 현대에 와서는 그 옛날 임금의 정확한 병명을 알 길은 없다. 오래도록 앓은 설사 또한 당뇨성 설사 혹은 당뇨와 스트레스로 인한 과민성 대장 증후군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특히 경종은 세자 시절부터 굉장한 스트레스에 눌려있었고 이런 상태에 오래 있으면 장에 있는 뉴런이 자살한다. 병명이 어쨌든 간에, 확실한 것은 쉽게 나을 간단한 병세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후 와병중인 경종의 증세는 점점 악화된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고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리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豆豉湯) 및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진어하도록 청하였다. >---- >《[[경종실록]]》, 경종 4년(1724) 8월 21일 1번째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408021_001|기사]] 2주 정도가 지난 8월 20일, 경종은 저녁식사로 게장과 생감을 식사로 먹었는데, 이 게장과 생감은 전통적으로 한의학에서 매우 나쁘게 보는 음식 조합이다.[* 현대 의학적 관점으로도 이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게는 [[식중독]]을 일으키기 쉬운 식재료이고, 여기다 감의 탄닌 성분까지 더해지면 소화불량이 일어나기 쉽다. 열처리하지 않은 수산물은 바이러스를 잡을 수 없고, 감의 탄닌은 변비를 유발한다. 소화기관 문제로 와병중이던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은 치명타였을 것이다. 다만 [[게장]] 문서에는 그에 대한 반론도 함께 정리되어 있으니 유의할 것.] 결국 식사 직후부터 복통과 설사가 악화되자 의관들은 경종이 한의학적으로 꺼리는 게장과 감을 먹은 사실을 알고 경악하여 즉시 곽향정기산과 두시탕, 인삼차를 계속 처방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고, 24일 오전에 경종은 아예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 24일 의관 이공윤은 "삼다(蔘茶: 인삼차)를 쓰면 안 된다. 계지마황탕(桂枝麻黃湯) 2첩만 진어할 것 같으면 설사는 금방 멎게 할 수 있다."라면서 경종에게 계지마황탕을 처방했지만 저녁에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이에 당시 [[세자|세제]](世弟)였던 영조와 도제조였던 우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신하들이 급히 경종을 찾아가고 영조는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 하는 지시를 내렸다. 난데없는 지시에 이공윤은 처음엔 반대했지만 영조의 강력한 주장에 결국 이에 인삼차를 2번 복용했다. 그러자 경종의 안시(眼視)가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온기를 찾았다고 한다. 그렇게 되자 다들 안도했으나 얼마 뒤 경종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고, 이때 영조와 이광좌는 종묘에 가서 경종의 안녕과 쾌유를 비는 기도를 올리려 하는데 그 기도가 시작하기도 전에 경종이 결국 사망하고 만다. 경종이 계속 와병중이긴 했으나 위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상황을 급속도로 악화시키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은 게장과 생감으로 꾸려진 8월 20일날의 식사였다. 따라서 이 식단을 누가 짰느냐를 둘러싸고 스캔들이 집요하게 발생했으며, 영조 치세 내내 고변이나 난이 발생하면 반대세력은 '''이 게장 식단을 영조가 올린 것이라 주장하며''' 영조를 '형을 죽인 패륜임금'으로 몰아세우는 경우가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